티스토리 뷰
목차
말기 흑색종 환자의 사망률을 약 30% 낮춘 면역 관문 억제제가 단 4년 만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가족이 항암 치료를 받을 때 저는 그 숫자가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면역 항암제, 어떻게 암 치료의 판을 바꿨나
가족이 항암 치료를 받던 시절, 저는 병원 복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구토를 반복하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존의 치료 방식이 암세포뿐 아니라 사람 자체를 갉아먹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로 잘라내고, 방사선으로 태우고, 독한 약물로 죽이는 방식은 정상 세포까지 함께 파괴했으니까요. 그때 제가 간절히 바랐던 건 암세포만 골라서 없애주는 무언가였습니다.
면역 항암제의 출발점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면역학자 제임스 앨리슨이 CTLA-4라는 수용체를 연구하다가 결정적인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CTLA-4란 T세포, 즉 우리 몸의 면역 전투 병사들의 활성화를 억제하는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단백질 수용체입니다. 당시 학계에서는 정반대로, 면역 반응을 가속화하는 물질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앨리슨이 이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죠. 앨리슨은 이 브레이크를 막는 항체를 만들어 실험 쥐에 투여했고, 종양이 사라지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면역계가 암을 인식조차 못 할 거라는 게 그동안의 통념이었으니까요.
이 아이디어를 임상까지 밀어붙여 탄생한 약이 이필리무맙이고,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큅(BMS)이 이를 여보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 FDA 승인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FDA 승인이란 미국 식품의약국이 해당 약물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공식 인정한다는 의미로, 신약이 시장에 나오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관문입니다(출처: FDA 공식 사이트). 말기 흑색종 환자의 사망률을 약 30% 낮췄다는 결과는 당시 기준으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여보이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면역계의 브레이크를 통째로 풀어버리는 방식이라, 자가 면역 질환과 유사한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자가 면역 질환이란 면역계가 적군이 아닌 자신의 정상 조직을 공격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한계를 극복한 것이 바로 PD-1 경로였습니다. PD-1은 1991년 교토대 혼조 다스쿠 연구실에서 처음 발견된 수용체로, 종양 세포 주변에서만 선택적으로 T세포의 브레이크를 작동시킵니다. 쉽게 말해 암이 있는 곳에서만 면역계를 속여 공격을 멈추게 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이 경로를 차단하면 부작용은 줄이면서 항암 효과는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 CTLA-4 억제제(여보이): 면역계 브레이크를 전반적으로 해제 → 부작용 범위 넓음
- PD-1 억제제(키트루다, 옵디보): 종양 미세 환경에서만 선택적으로 작동 → 상대적으로 부작용 적음
- 면역 관문 억제제 공통점: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면역계가 스스로 암을 인식하게 유도
후발 주자 머크가 키트루다로 1등을 차지한 전략
키트루다의 핵심 물질인 펨브롤리주맙은 사실 머크가 직접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2005년 네덜란드의 오가논이라는 회사가 처음 발견했고, 쉐링 플라우가 오가논을 인수했으며, 2009년 머크가 쉐링 플라우를 인수하면서 반쯤 우연처럼 손에 들어온 물질이었습니다. 인수 당시 머크 내부에서는 이 물질에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처음 알았을 때,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머크가 태도를 바꾼 건 BMS의 옵디보 초기 임상 데이터가 유망하게 나오면서부터였습니다. 그제서야 개발을 긴급 가속화하기로 결정했고, 여기서 머크가 활용한 전략이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먼저 여러 암종과 용량에 대한 임상 시험을 동시다발로 진행했습니다. 결과가 나오는 즉시 같은 실험 틀 안에서 새로운 실험군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극도로 압축했습니다.
두 번째는 BTD 제도의 활용이었습니다. BTD란 돌파구 치료제 지정(Breakthrough Therapy Designation)으로, FDA가 유망한 신약의 개발 과정 전반에 걸쳐 신속하게 협의해 주는 제도입니다(출처: FDA 공식 사이트). 단계마다 수개월씩 기다려야 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BTD를 통해 FDA와 수시로 논의하면서 수년 단위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BMS의 옵디보가 이미 2006년부터 진행 중이던 임상을 중간에 바꾸기 어려웠던 것과 정반대로, 머크는 처음부터 이 제도에 맞춰 전략을 설계했습니다.
세 번째이자 결정적이었던 것은 비소세포 폐암 임상 설계의 차이였습니다. BMS는 폐암 환자 전체를 대상으로 넓게 승인 신청을 했다가 탈락했습니다. 반면 머크는 PD-L1 발현율이 높은 환자군, 즉 효과가 확실히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집단으로 범위를 좁혀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이 한 번의 결과 차이가 BMS의 시총에서 수십억 달러를 증발시켰습니다. 제가 이 대목을 읽으며 느낀 건, 속도보다 정확한 전략이 더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2015년에는 91세의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4기 흑색종 진단을 받고 키트루다로 치료를 받은 뒤, 그해 12월 뇌 MRI에서 종양이 사라졌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후 카터 전 대통령은 9년을 더 생존했습니다. 이 사례가 미국 사회에 면역 항암제를 각인시키는 강력한 계기가 됐고, 환자와 가족들이 직접 주치의에게 키트루다 처방을 요청하는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유명인 사례 하나가 치료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속도는 어떤 학술 논문보다 빠릅니다.
현재 키트루다는 흑색종, 비소세포 폐암을 시작으로 위식도 선암, 자궁 경부암, 간세포암, 신장암, 자궁내막암, 방광암 등 수십 개 암종에 적응증을 확보한 블록버스터 약물이 됐습니다. 미국 기준 연간 약 20만 달러에 달하는 가격으로 머크 전체 매출의 절반 가까이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28년 주요 물질 특허 만료를 앞두고, 머크는 전 세계 53개국에서 1,212건의 관련 특허를 출원해 2042년까지 특허 효력을 연장하는 에버그리닝 전략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버그리닝이란 원특허 만료 이전에 제형, 투약 방식, 새로운 적응증 등 부차 특허를 쌓아 사실상 독점 기간을 늘리는 전략을 말합니다. 저는 이 전략이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지만,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 입장에서는 분명히 아픈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키트루다는 어떤 암에 효과가 있나요?
A. 현재 흑색종, 비소세포 폐암을 비롯해 위식도 선암, 자궁 경부암, 간세포암, 신장암, 자궁내막암, 방광암 등 수십 개 암종에 적응증이 승인되어 있습니다. 임상 시험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적용 가능한 암종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다만 모든 환자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며, PD-L1 발현율 등 바이오마커 검사를 통해 효과를 예측합니다.
Q. 면역 항암제는 기존 항암 치료와 부작용이 다른가요?
A. 네, 다릅니다. 기존 항암제(세포독성 항암제)는 정상 세포까지 함께 파괴해 탈모, 극심한 구토, 면역 저하 등이 나타나는 반면, 면역 항암제는 면역계를 활성화해 암을 공격하는 방식이라 부작용의 종류 자체가 다릅니다. 다만 과도한 면역 반응으로 폐, 장, 간 등에 염증이 생기는 면역 관련 이상 반응이 나타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합니다.
Q. 키트루다 가격이 왜 이렇게 비싼가요?
A. 미국 기준 키트루다의 연간 치료 비용은 평균 약 20만 달러(약 2억 7천만 원)에 달합니다. 개발에 수십 년의 연구와 막대한 임상 비용이 투입된 데다, 머크가 에버그리닝 전략으로 특허 독점을 유지하고 있어 제네릭이나 바이오시밀러 경쟁이 아직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2028년 주요 특허 만료 이후 바이오시밀러가 등장하면 가격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Q. 옵디보와 키트루다는 무엇이 다른가요?
A. 둘 다 PD-1을 표적으로 하는 면역 관문 억제제이지만, 개발사와 승인 전략이 달랐습니다. BMS의 옵디보는 더 일찍 개발을 시작했지만 BTD 제도를 처음부터 활용하기 어려웠고 비소세포 폐암 임상에서 탈락한 반면, 머크의 키트루다는 더 좁은 환자군을 대상으로 신속 승인을 받으며 시장 선점에 성공했습니다. 지금은 키트루다가 매출 기준으로 압도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결론
가족의 투병을 곁에서 지켜보며 암 치료에 대해 이토록 간절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키트루다로 이어지는 면역 항암제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저는 단순히 신약 개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환자의 생존 가능성을 넓혀온 과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면역 관문 억제제가 정상 세포를 파괴하지 않고 암을 치료한다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혁신적인 것인지는, 기존 항암 치료의 고통을 직접 목격해 본 사람이라면 더 절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런 혁신적 치료제일수록 접근성 문제는 항상 따라옵니다. 연간 20만 달러에 달하는 가격과 에버그리닝 전략은 분명 짚어야 할 부분입니다. 2028년 특허 만료 이후 바이오시밀러 경쟁이 본격화되면 더 많은 환자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키트루다 이후 어떤 면역 항암제가 또 다른 판을 바꿀지, 앞으로도 관심을 놓지 않을 생각입니다.